★한국어교사양성

한국문학개론-용비어천가의 문학적의의 정리

우사기센세 2017. 1. 9. 20:47

용비어천가는 1445년(세종 27) 4월에 편찬되어 1447년(세종 29) 5월에 간행된, 조선왕조의 창업을 송영(頌詠)한 노래이다. 모두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로서, 한글로 엮은 책으로는 한국 최초의 것이다. 왕명에 따라 당시 새로이 제정된 훈민정음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권제(權踶) 등이 짓고,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 등이 주석(註釋)하였으며, 정인지가 서문(序文)을 쓰고 최항(崔恒)이 발문(跋文)을 썼다.

용비어천가의 내용은 조선 건국의 유래가 용유구함과 조상들의 성덕을 찬송하고, 태조(太祖)의 창업이 천명에 따른 것임을 밝힌 다음 후세의 왕들에게 경계하여 자손의 보수(保守)와 영창(永昌)을 비는 뜻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장(每章) 2행에 매행(每行) 4구로 되어 있으나, 1장이 3구이고 125장이 9구로 된 것만은 예외이다. 3장에서 109장까지는 대개 첫 절에 중국·역대 제왕의 위적(偉蹟)을 칭송하였고, 다음 절에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太祖)·태종(太宗) 등 6대 임금의 사적(事蹟)을 읊고 있다.

110장에서 124장까지는 물망장(勿忘章)이라 하여 “닛디 마사진쇼셔”로 끝마친다.

본문내용을 살펴보면

Ⅰ.서론

악장은 나라의 제향(祭享)이나 연향(宴享) 때 음악에 맞추어 부른 노래 가사의 총칭하는 것으로 주로 조선 초기의 특정한 시가들에 붙여진 문학장르 명칭이다. 악장은 <樂章歌詞>, <樂學軌範>,<時用鄕樂譜>에 수록되어 있으며 건국초의 개국공신들이 조선건국의 정당성, 문물제도의 찬양, 임금의 업적과 만수 무강의 기원, 왕조의 번창 축원, 후왕에 대한 권계 등의 목적으로 창작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악장은 <龍飛御天歌>로 조선왕조의 창업을 이룩한 태조와 태종의 영웅적 행적과 덕성을 기리면서 왕조창업의 당위성을 드러내려는 서사시적 성격의 악장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장의 성격으로 악장의 개념과 장르적 성격에 있어서 많은 논란이 있어왔으며 악장이 그 동안 국문학사에서 크게 중시되지 못하였다. 본 장에서는 악장의 개념과 장르적 성격, 국문학적 위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악장의 대표작인 <용비어천가>의 성립연대, 撰者, 창작 동기, 구조와 율격, 장르 논의에 대해 살펴보겠다.

Ⅱ. 악장

1.악장의 개념과 장르적 성격

악장의 개념과 그 장르설정에 있어서 학자들마다 다양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성기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히고 있다.

악장이란 말은 궁중에서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쓰이는 노래 가사를 두고 부르는 일반적인 이름이다.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에 쓰기 위하여 새로 지은 노래 가사들을 특별히 따로 묶어서 악장이라 이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악장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대하여, 또는 악장이라는 장르를 설정하는 데 대하여 어려움이 있다. 악장에 속하는 작품들이 잡다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어, 문학적 장르로 설정할 만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장르 설정의 타당한 근거를 찾기 위해서는 통일성의 발견에 초점이 모아져야 하지만, 이에 앞서 몇 가지 확인해야 할 전제가 있다. 국문시가의 장르체계에 두어야 하고, 악장에 관한 장르론적 검토는 이론 장르로서가 아니가 역사적 장르로서이다. 형식적 통일성만이 장르 설정의 근거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점을 전제로 든다면 악장은 왕조창업의 당위성을 널리 입증하고 통치 질서를 확립할 목적으로 창작되기 때문에 頌禱적 성격을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다. 악장의 통일성은 형식보다 오히려 송도적 성격이 더 중요한 원리로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유리왕 때의 <도솔가>에서부터 우리말 시가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비교적 일반성을 띤 성격이기에 송도적 성격이 곧 장르로 묶을 수 있는 통일성의 원리라고 하기에는 아직 미진하다. 악장이 장르로서의 성격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내기 시작하는 데에는 형식적 통일성에 있다. 연장형식과 분절형식이 지배적인 형식적 특성이다. <용비어천가>는 연장형식에 기저하면서도 이를 100여장이상으로 장편화시키고 분절형식에 기저하면서도 뒷절을 앞절과 대등한 자격으로 병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이 악장으로서 독특한 형식을 획득하는 것이다.

조규익은 악관이 익히는 악장을 樂府라 한다면, 악부의 의미 범주 여하에 따라서는 학계에서 언급되던 악장의 폭도 상당히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원래 악장이란 국가적 차원의 교사지례(郊祀之禮)를 제정하면서 크게 확충된 공식적인 노래말의 양식이다.

 

이 《용비어천가》의 형식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 원문 다음에 한역시(漢譯詩)와 언해(諺解)를 달았다. 또 이 노래의 1·2·3·4·125장 등 5장에는 곡을 지어서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봉래의(鳳來儀)》 《여민락(與民樂)》 등의 악보를 만들고 조정의 연례악(宴體樂)으로 사용하였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14 〈악보(樂譜)〉에 한글 가사 전문과 그 악보가 실려 전한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시의 형식을 무시하고 충분한 표현과 운율을 얻지 못하여 시가(詩歌)로서의 완벽에는 미흡한 점이 없지 않으나, 한글로 기록된 최고(最古)의 문헌으로서 15세기의 언어와 문학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주석(註釋) 중의 여진(女眞)·왜(倭) 등에 관한 기록은 역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1612년(광해군 4), 1659년(효종 10), 1765년(영조 41)에 각각 나온 중간본(重刊本)이 있으나, 초간본은 그 전질(全帙)이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영인본(影印本)은 광해군 연간의 재간본(再刊本)을 대본으로 하여 1938년 경성(京城)제국대학에서 찍어낸 것이며, 1948년에 김성칠(金聖七)이 이를 다시 발췌·영인하였고, 1956년 허웅(許雄)의 주해본(註解本) 및 1968년 김형규(金亨奎)의 《고가요주해(古歌謠註解)》 등도 있다.

 

용비어천가를 만든목적은 백성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였다 용비어천가를 만들 당시

왕은 세종 때이며 이때에 백성들은 孝에 관한개념이 없어 자식이 부모를 죽이며 사람들은

혼란에 빠졌으며 왕은 이에 따른 예방책으로 삼강행실도, 용비어천가, 훈민정음 등을 창제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깨닮음과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수많은 것들을 가르침으로서

민생안정과 정치의 평온화를 계획하고 그 계획아래 용비어천가를 만들고 배포함으로써

훈민정음의 위상을 널리 떨쳤으며 도리어 한글까지 이르게 된 국문학상 적인 의의가 있다 또한 용비어천가는 125장에 달하는 서사시이다 따라서 문학의 4대요소인 시, 소설, 수필, 희곡 중 시의 한부분인 "서사시"를 썼다는 것에서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양반사회라고 불린다 양반들은 시조를 읊으며 교양생활을 즐겼으며 서민들도 시에는 시조를 대부분 사용하였다. 하지만 세종 용비어천가를 반포함으로써 서사시라는 시의 한 분야를 발전시킬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우리의 문학적 소양도 더 넓어짐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